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즈 요시히로 (문단 편집) === [[당주]]가 되기까지 === 요시히로는 사쓰마 [[시마즈]] 가 17대 당주이며,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큰형인 요시히사를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규슈]] 통일에 힘쓴 무장이다. 원래는 타다히라(忠平)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을 받아 요시타카로 바꿨다가 요시히로로 바꿨다고 하며, 1554년에 게도인 요시시게, 이리키인 시게츠구, 가모 노리키요, 시카리 시게토요 등의 연합군과 이와츠루기 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처음 출전하여 적의 수급을 취했지만 5개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1560년 3월 19일에 이토 요시스케의 공격에 시마즈 타다치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1562년에 사쓰마 본가가 키모츠키 가문의 공격을 받자 귀환하였다가 오비 성이 함락돼서 양자 결연은 풀렸다. 키타하라 가문의 영지가 이토 가문에게 빼앗기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도왔지만 키타하라 가문 내부에 배반자가 나오자 마사키인(진행원)이 되어 이이노 성으로 향했으며, 1566년에 요시스케가 이이노 성 공략을 위해 미츠야마 성을 건설하자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토시히사]] 등과 완성하기 전에 공격했지만 부상을 입은 채로 패하면서 후퇴했다. 1572년에 휴가 키자키바루에서 요시스케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 이 승리로 이토 가문을 쇠락에 빠지게 해, 1577년에는 요시스케를 휴가에서 추방했다. 1578년 시마즈는 오늘날의 [[미야자키현]]인 휴가 지방을 공격, 휴가의 다이묘인 이토 요시스케가 규슈 북부의 강자 [[오토모 소린]]에게 망명한다. 오토모는 이 명분으로 시마즈와 결판을 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요시히로가 미미카와 전투에서 오토모를 격파했다. 그리고 1585년에 히고 국의 슈다이가 되어 아소 가문을 멸망시켰다. 오토모는 세력권이던 치쿠고, 치쿠젠은 물론 본거지인 분고까지 시마즈에게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마즈는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오토모 소린]]은 [[혼슈]]를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한다. 1586년에 시마즈는 도요토미군이 오기 전에 규슈를 통일해둘 생각으로 오토모를 총공격했지만, 오토모군의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 탓에 때맞춰 규슈를 통일하지 못했다. 1587년에는 오오토모 가문의 원군 요청을 받고 큐슈에 당도한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과 싸웠으나 혼슈를 장악한 도요토미와는 체급 차이가 너무 컸기에 맥없이 패배했고, 규슈 통일전쟁에서 얻었던 땅들을 거의 다 토해내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았다. 이후 장남인 요시히사(후의 류하쿠)가 책임을 지고 은퇴하였으므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서 가독을 상속했다. 이후 요시히사는 후시미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으므로 [[코에이]] 게임 등에서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오류이며, 비록 요시히로가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됐지만 히데요시의 강압에 의한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신들은 아직 요시히사를 당주로 생각하여 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히메와 결혼하여 시마즈 가의 당주가 될 수 있었고, 타다츠네의 후계자 역시 카메쥬히메가 결정했다. 카메쥬히메 자신은 자식이 없었으나 언니의 손녀가 낳은 타다츠네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정작 타다츠네 자신은 다른 아들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